나의 이야기

인연<사람이야기>

헤게모니&술푼세상 2012. 11. 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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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트라우마가 있다
막연히 배우지 못한 자격지심에서 오는 열등감과 패배주의다
한편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에 대한 무한한 열성과 존경심이다
이런 것들은 내 가슴속 밑바닥에 한 <限>과 응어리가 되어 돌덩이처럼 굳어진 상태다
나도 잘나고 똑똑한 대학생 형 하나만 있었으면 내 인생을 180%로 달라질 수 있을 거야
노동자의 화신 <分身>이라 상징되는 전태일 열사의 소원처럼 어릴 적에 나는 대학생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1974년 그해 나는 서울 독산동 어느 도금 공장에서 잡일을 했다 비록 나이는 14살에 불과했지만 사회 경험으로 따지면 3년 차 초급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의 짬밥 일수가 내 인생을 녹록하게 평탄하게 붙들어 매지 않았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짧은 가방끈이었다. 나는 겨우 한글을 읽었으며 발음이 나오는 대로 쓰고 적는 초보 수준이라 할까? 당장 한글의 밭침이나 띄어쓰기 따위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내 글씨체를 안 보여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한글의 뜻을 잘 몰라 가끔 엉뚱한 짓을 범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실수의 연속은 물론이거니와 절대 반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팀워크를 중시하는 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는 어느 누구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용서라는 말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고 게다가 미안하다 죄송하다 하는 말은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늘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는 무식한 놈으로 열외 되어 있었고 심심 땅콩처럼 잦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의 하루일과는 욕바가지로 시작해서 마무리는 동티 나게 얻어터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많은 폭력에 시달리다 보니 나중에는 인이 박혀 아픈 것도 모를 정도였다 얻어맞는 데는 이골이 났다 어린 나이에 서럽고 슬픈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차라리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었는데 입에 담기 어려운 언어폭력들은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럴 때면 엄마 얼굴이 보고 싶고 내 가족들이 그리웠지만 당장은 목구멍에 포도청이었다 하루하루 참는 것도 요령이 되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리고 나면 후식처럼 선물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크림빵 아니면 이름 모를 꽈배기 과자였다 이런 것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면서 내일은 무슨 일로 날 때릴까 하고 조바심하기도 했었다 빵조각으로 우는 나를 달랬고 그걸로 만사가 해결되는 눈물 젖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연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내가 문득 사람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매번 맞고만 살 수가 없어서 도금공장 일을 그만두고 문래동 철공소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건 도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공장사람들이 아니었던가ㅡ 말없이 떠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친한 또래 친구한테 사정전후를 말했다 그러나 그게 큰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친구는 그만 사장한테 고자질을 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악랄하고 악질적인 사장의 진면목을 생생히 체험해야만 했다 인간 마루타였다 기숙사에서 거의 초주검에 이르기까지 맞고 난 후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한참 지났을까 아랫도리에서 격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참으로 놀랍고 참혹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 <sym boi> 중요 부위는 명주실로 묶여 있었고 명주실은 그대로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 문고리에 턱 걸쳐 놓았다 그것도 한방을 같이 쓰는 직장 동료들을 윽박질러 그 못된 짓을 꾸몄던 것이다 인간말종 사장은 말했다 도망치는 놈은 누구라도 나처럼 본보기가 된다고 말이다 생각해 보라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참으로 더러운 인간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눈물을 삼키며 땅만 쳐다보며 지냈다 그곳이 퉁퉁 부어 팔자걸음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상처가 심했으면 병원에서 무명실을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다 의사께서 자못 큰일 날 뻔했다고 위로할 만큼 그곳 상처 부위가 매우 컸다 사장은 염병하고 천벌 받을 짓을 했지만 눈 한 번도 끔벅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했다 그러나 그 일은 네게 있어 전화위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문이 꼬리를 물고 돌고 돌았다 나중에는 사장의 아들 귀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 아들은 서울 어느 모 대학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참으로 부러움에 대상이었다 가끔 공장에 찾을 때마다 몸을 가리지 않고 공장 일을 거들었고 때론 나이 어린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히 대해주는 따뜻한 형 같은 존재였다 나하고는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사람 냄새를 풍기는 인물만은 틀림없었다 똑똑히 기억한다 그 형은 나의 참혹한 사건을 어떻게 들었는지 어느 날 공장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강하게 성토했다 부자지간에 매우 큰소리가 오갈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한 달 월급 6000원 플러스+알파 4000원을 더해 철공소가 많은 문래동으로 직장을 옮길 수가 있었다 순전히 대학생 그 형의 도움과 배려 때문이었다 자꾸 공장 뒤를 돌아보면서 대학생 형을 얼마나 고마워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세월은 많이 흘러 나는 지천명 중반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10대 그 시절에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왕지사 서울대 나온 똑똑한 형 하나만 사귀어 봤으면 정말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며 살아왔다 이쯤에서 돌이켜 보면 그 소원들이 이루어졌는지 확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내 인생 스토리를 살펴보면 나보다 더 배우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은 사실이고 행운이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나는 인생의 참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피그말리온의 효과도 얻었다 물론 수십 번 반복되게 읽었던 성경책과 수천 권의 책들을 통해서 한글을 터득하고 결국 사람답게 사람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 속에 꿋꿋이 살아왔다고 말을 해도 무방하다
속된 말로 사 <使> 자 <者>로 끝이 나는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 만나봤고 지금도 꾸준한 관계를 지속해 나아가고 있는 걸 보면 한마디로 용 됐다고나 할까? 용쓴 결과다 내 주변에는 여럿 사람들이 있다 이곳에서 각종모임을 일곱 군데나 할 정도니 그때그때마다 사람 마음들을 속속 드라다 볼 때가 많다 어쩌면 어릴 적 눈칫밥 경험에서 오는 순발력인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면 만날수록 기분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보면 볼수록 싫증 나고 기분 나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싫든 좋든 만나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닌가 쉽게 정을 주고 쉽게 상처를 받는 나로서는 어쩌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의 그리움이라 할까? 몇 달 전 좋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좋게만 느껴지는 그 사람 ㅡ 그 형님을 생각하면 기분이 흐뭇하고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형님은 첫째 말이 별로 없다 둘째 사람을 존중한다. 셋째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배움을 배움 답게 쓰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겸손하다 비록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지만 안 봐도 비디오처럼 느껴지는 그림 같은 사람이다 이제는 나도 약간이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다 한평생 살면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며 사는 것도 짧기만 하는데 굳이 싫은 사람들을 만나서 얼굴 붉힐 일 있나?
 
벌써 송년회가 기다려진다
 
동생이 참 좋아
우리끼리 만날까
 
며칠 전 형님께서 내 등뒤에 대고 속삭인 말이다
형님은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나왔다
모 신문사 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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