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그해 저는 꿈에 그리던 서울 구로공단에 입성을 했습니다
2년여의 눈물 젖은 철가방 생활을 접고 여봐란듯이 산업역군의 공돌이가 되었던 거죠
그때 당시 제가 다녔던 회사 이름은 국제보세였는데 종업원 수만 약 400명이 되었어요
나중에는 진도모피로 명칭이 변경되었지요
지금 같아서는 결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직업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얼마나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이었는지 머리가 흔들거릴 정도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말 그대로 각종 죽은 동물들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수백만 원 호가하는 모피 옷을 만드는 과정이었으니 그에 따른 유해한 화공약품<독극물>들은 사람 생명에 있어 매우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지면이 허락된다면 모피가족 하등동물<下等動物>들의 애환과 서러움을 글로 엮으렵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처럼.....
모피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와 공돌이의 열 손가락들은 성한대가 한군데도 없었고 손톱들은 늘 부러지고 비틀어지고 항상 썩어 있었습니다
불행한 시절이었고 가난한 시대었지요
그래도 그나마 첫째 주 셋째 주 쉬는 일요일 있었기에 힘든 공장 일을 참고 버티며 살아왔던것 같아요
동료들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놀았던 곳이 남산공원이었어요
주황색깔의 <7000원짜리>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당시 유행했던 고고<GO GO> 춤을 추며 우리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대학생의 청춘문화와 통기타문화를 흉내 내곤 했습니다
흰색 남방에 청색 나팔바지에 한껏 뽐내면서 우리들 끼리만 어울릴 수 있는 여인들을 찾곤 했지요
이젠 기억들이 가물가물 해오지만 남산 길목에는 잡다한 식품들로 번데기. 뻥튀기. 호떡 솜사탕外 먹을거리가 즐비했고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분명 케이블카가 있었는데 왕복 운행을 했었는지 멈춰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지금처럼 운행을 했다손 치더라도 제가 케이블카를 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엄두도 안났을 겁니다. 한 달 월급이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야간근무를 해도 26,000원 정도가 전부었으니까요
열일곱 살 그 애가....
서울 남산을 35년 만에 찾았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감개무량<感慨無量>했습니다
대형면허 소지자 김여사..
인간 네비게이션^^
주차장 50M 앞두고 30여분 소요
남산 전망대 포함 줄선시간 3시간여
총 4시간 ㅡ사람 구경
남산은 외국인들의 필수 코스
남산 케이블카 입구
남산은 반드시 어제 와야 함~~?
주차장에서 케이블카 타는곳 까지 1시간 여 소요됨
요금 6000원
*총13명 동행*
케이블카에서 찍은 서울 전경
남산타워
대학생들 퍼포먼스 장면
넋놓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무슨 사연이 많길래...
전망대 요금 9.000 원
난 야경사진을 찍을줄 몰라 ^^
10여년 전
대추리를 떠나 서울로 가더니만 신축건물 집한채 장만했더군요
축하한다ㅡ 처남~~
남산 전망대에서
반포 유원지ㅡ 음악당에서 한컷
통닭 시켜놓고 술한잔하니 금상첨화더라
왜 맛집인줄 알겠지만.. 깨끗함과 청결함에 많은 신경을 쓰시오
나는 머리카락이 나와도 한번쯤은 모른체 하고 먹는사람입니다
오리맛은 죽여 줌
컵에 소맥을 한것은 어쩔 수 없이~~ 청결도는 no
후식치곤ㅡ 괜찮은 맛
1970년대 전기줄~~
사람들로 인산인해
청명한 하늘 그림이 좋다
귀여운 조카들
처남댁 식구들
맛은 양호 ^^
남양주 <페러 글라이딩> 착륙장
다음 도착지는 양평 두물머리였음
유감스럽게도 카메라 밧데리가 방진되어 사진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날 남산에서 시간..지체가 없었다면 동대문 <두타>가서 옷도 사고 명동 볼거리도 즐겼을 텐데~~
그래도 1박2일~~ 처남 집들이겸 서울구경은 흥미롭고 기분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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