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눈물젖은 빵을 아는가?

헤게모니&술푼세상 2022. 5. 4.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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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청 옆

 
[강지원이 만난 사람] 흰 밀가루 빵 대신 통곡물 빵으로~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 1호 소지자 곽성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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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이 만난 사람] 흰 밀가루 빵 대신 통곡물 빵으로~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 1호 소지자 곽성

【건강다이제스트 | 통곡물자연식운동본부 강지원 상임대표】“가난했던 시절의 흰 밀가루 문화를 확 바꾸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온통 흰 밀가루 천국이다. 빵뿐 아니라 피자, 스파게티, 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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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복 재생하지만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사 때문에 부득이 11살에 고향을 등지고 친척집에 말 못 할 머슴살이를 1년 넘게 하고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하여 곧바로 홀로 단신 서울로 입성한다. 그토록 동경했던 미지의 세계의 서울살이는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 시다로 시작해서 수많은 직업을 찾아 헤맨다.

 

/꽃집/목욕탕/여관/식당/철공소/도금업체/시계공장/ 극장청소/ 먹고사는 일터를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 이유는 시골 출신보다는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 때문에 가는 곳마다, 주인장들은 수시로 폭행과 협박과 돈 갈취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근로기준법을 쓰레기통으로 취급했고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인권은 똥 물속에 튀겨버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24시간을 일하면 선심 쓰듯 한 달 월급 몇천 원을 내 손에 쥐어 주곤 했다. 어린 나이에 배가 고파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3년째 소식이 끊긴 엄마가 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 바닥을 눈 빠지게 다니며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었던가? 누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다고 했던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극적으로 엄마와 일부 가족들과 상봉하는 기쁨을 맞이한다. 그 영향과 덕분이었을까? 15살 나이에 변변치 못한 직업 행렬은 끝이 나고 청량리 선린호텔에 벨보이로 자리를 잡는다.

 

외국인을 상대한 섹스관광호텔로 차마 못 볼 광경이 많았지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서막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고한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 김대두를 결정적으로 검거한 청량리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세상 물정을 알려면 신문기사와 책(독서)을 멀리하지 마라! 어디에 있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그러나 호텔 생활을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나타난다. 16살 나이가 버려지는 초겨울 어느 날에 큰집 둘째 형? 그러니까 족보로 따지면 사촌 형이다. 곽성호 형은 다짜고짜 나에게 안정된 직업과 나의 미래를 위해서 빵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내 나이 11살에 작고하신 아버지는 나에게 꿈을 물어 오셨다. 둘째야! 너는 장차 어떤 모습으로 불쌍한 엄마를 모실 거니? 아버지 저는 당장 먹고 싶은 게 부족하여 어른이 되면 빵공장 사장이 될 거예요. 대견하다며 내 머리를 쓰담쓰담하시며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짓던 아버지는 우리 집의 마지막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무교동에 자리 잡은 Xxx제과점은 서울에서 손꼽힐 정도로 알아주는 매장 규모가 꽤 크고 모든 라인이 공장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층은 가게 매장과 빵 제조실, 2충은 사무실과 직원 숙소, 지하실은 제과점에 쓰이는 잡동사니가 쌓여있었다. 한참 빵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나에게 운명의 시간은 재깍재깍 다가오고 있었다.

 

1977년 7월 8일 늦은 오후쯤 지하실에 있는 밀가루 몇 포대를 제조실에 옮기려고 동갑내기 친구와 함께 창고문을 열었다. 여기서 나와 친구는 손동작을 멈춰야 했다. 속칭 구름과자라고 부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켜는 순간, 지하실에 있던 LPG 가스통의 밸브는 순식간에 천장으로 튕겨져 올라가고 바닥에 흥건히 젖어있는 가스 액체는 불바다로 활활 타오르고 만다.

 

내가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일주일도 지난 8월 16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갑내기 친구는 목 주변에 큰 화상을 입어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아시다시피 화상치료는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바참하고 처참하리 만큼 끔찍하다. 어떤 병마보다 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이 화상환자들이다.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던 나는 무려 2개월 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집중치료를 받는다. 이산화탄소를 깊게 흡입한 관계로 양쪽 폐에 이상이 있었지만 한편 생사의 기적인지 몰라도 얼굴과 손 말고는 화상부위가 경미했기 때문에 몇 주간 동안 "똑바로 일어서고 무릎 끓고 앉기" 재활치료를 받고 병원문은 나섰다.

 

이미 청명한 가을은 와있었지만, 내 눈에 비친 가을 하늘은 누렇게 떠 있었다. 내 얼굴처럼~~ 그 후 구로공단 모피업 국제보세(진도모피)와 인천시 삼오통상의 공돌이로 변신한다. 내가 장기간 입원했을 때 병원 방문에 인색했고 나몰라 했던 사촌 형과 내 보상금 60만 원을 우리 가족들도 모르게 꿀꺽했던 어떤 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무지에서 온 운명과 숙명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나는 참으로 괴롭고 서러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몇 주 전, 그러니까? 안동소주 50도를 먹고 뻗어버린 토요일에 사촌 형께서 전화로 급히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일흔 살이 넘는 사촌 형께서 우리 지역까지 방문하시고 그쪽 형제와 우리 쪽 형제들 간에 상의할 일이 있었나 보다. 일요일까지 정신 못 차린 내가 사촌 형을 만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막냇동생을 통해 대충 전후 사정을 들었지만 문제는 사촌 형이 선물로 주고 간 밀빵이다.

 

보리로 만든 밀빵 때문에 이렇게 긴 사연을 쓰는 이유다. 마침 사위와 딸과 손자 그리고 장모님과 집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빵 세트를 먹는데 다들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빵맛에 극찬을 한다. 이런 빵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다시 찾고 싶은 밀빵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70년 초부터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살았던 장모님과 집사람이 처음으로 놀라운 고백을 터트린다. 1977년 서울 제과점에서 큰 불이 난 보도를 TV 화면을 통해 봤는데  그게 사위었고 당신이었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어.

 

집사람을 23살에 만나 1년 연애하고 곧바로 결혼했으니 집사람은 11살 때 Xxx 제과점 화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다. 모두가 다 지난 일이고 잊혀야 할 기억들이야! 당장 밀빵 맛이 환상적이니 택배로 주문 좀 해봐!

 

우리가 괜히 미안하니까? 우리 집 주소로 말고 다른 주소로 하자. 끝내 막내동생에게 사촌 형의 전화번호를 따고 언제든지 밀빵을 시켜 먹고 있다. 일평생 빵으로 한 우물만 팠던 사촌 형은 비록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지만 제과빵의 명장/ 대학교수 역임/ 식품영양학 1호 박사/

 

가난에 짓눌린 사촌형은 맨땅에 헤딩했고 자수성가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이제는 빵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빵 한 개에 3.800원

 

성호 형님! 그날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친형께서 빵 기술을 배웠다면 살고도 남을 나이인데요. 당시에 우리 형을 부르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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