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인생에 있어 잊지 못하는 시간들~

헤게모니&술푼세상 2019. 9. 21. 01:35
반응형

 

 

◇서민의 군것질 "어묵"의 추억◇

 

사실 어묵보다 오뎅이 더 익숙한 단어다.

하지만 세월이 하수상하다보니 올바른 한글말로 표기하자고 한다.

 

페북에 두리뭉술 밝혔듯이 70년 대 어느 날 나는 막내와 함께,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서울시내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목적도 없이 혹시나 땅에 떨어진 동전이 없나 하는 마음이었다. 누가 지껄였나? 하늘이 두쪽 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말이다.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단 1원짜리 동전 구경 따위는 없었지만 마침 우리 형제의 눈을 휘둥그레 하는 것이 있었는데 회충약을 파는 약장사였다.

 

여기서 잠깐 중간생략을 해야겠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형제에겐 피눈물 나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막내가 약장사와 관객 앞에서 아랫도리를 내리고(?) 받은 200원을 들고 우리는 구로시장으로 냅다 달렸다.

 

어묵 떡볶이를 실컷 먹을 수 있어!

 

게눈 감추듯 떡볶이와 어묵 국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포만감에 빠져들 때, 나는 영악스럽게도 동생에게 어묵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었다. 가장 지저분하고 불량상태가 안 좋은 것이 어묵 생산 과정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약간 상한 닭들도 일단 삶고 튀기면 정상요리가 되는 것처럼, 당시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은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하고 부패한 음식(식중독)때문에 서울지역에 염병이 창궐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일단 먹고 죽어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강산이 몇번 변하고 정확히 국가부도의 (IMF) 날이 시작되던 90년 대 후반, 나는 막내와 함께 조치원에서 몇 킬로 떨어진 어묵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손질로 만들어야하는 꼬치어묵만 빼고 모든 어묵 종류는 최신형 자동 기계로 생산되었다. 위생청결은 두말없이 완벽했고 주마다(1회) 관계부처에서 나와 어묵 생산 과정을 빈틈없이 조사하고 점검했다.

 

막 생산된 뜨끈한 어묵에다 겉절이 김치를 돌돌말아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었고 배부른 포만감에 마냥 행복했다. 70년 그때 우리는 실업자 신세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구걸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100만 원 <돈다발>은 큰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형제에게 있어 가장 안정된 직장이었고 빠르게 가난을 벗어나게 해준 참으로 고마운 기업주를 보았고 사업체를 만났다.

 

이곳에서 우린 눈물젖은 빵을 멈쳤다.

 

아까 전, 도담동에 사는 정용욱 아우님께서 어묵볶음 요리(레시피)를 보니 군침이 돈다. 주방 쪽과는 거리가 먼 내가 냉장고 문을 여니, 지난 부산 가족여행 때 잊지 못할 어묵 먹방이 떠오른다.

 

국제시장 입구, 건너편에 대형 어묵 판매점이 있었다. 매장 안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어묵들이 이토록 다양하듯이 형형색색이고 맛이 오묘하고 기묘하고 야릇하고 짜릿하다.

 

면요리, 통닭; 피자, 햄버거, 못지않게 어묵의 끝판왕이다. 부산어묵 맛을 잊지 못해 다달이 어묵 택배를 시킨다. 봉지에(1kg) 16.000~ 18.000원 정도로 비싼 편이지만, 못 먹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여유가 있으니 골라서 먹거리를 산다.

 

냉동된 어묵과 손만두를 물에 삶은 다음 물기를 말끔히 빼고 인터넷 레시피를 살펴보니, 니기미, 당최 뭐라는 거야? 단순하게 사는 내가 복잡하게 살 필요 있나.!

 

냉장고를 한참 뒤적거리니 마침 닭갈비 양념용 봉지가 나를 미치게 만든다. 냄비에 물을 약간 넣고 센 불에 소스를 넣고 만두와 어묵을 집어넣고 약 3~ 4분 펄펄 끓으니, 냄새 향기가 맥력넘치는 상남자와 같다.

 

이거 소주&안주에 끝내준다.^

이러다 혼술 맛에 집에 있는 거

아녀,.....!?

늦은 밤에 이러면 안 되는데~~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