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반대는 강정마을 사람들의 땅값 보상<報償>을 더 받기위한 연출극이다.
전형적인 님비현상이다. 평온한 마을에 외부세력들이 들어와 갈등과 분란을 조성하고 있다.
中略
국가에서 추진하는 일들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안보와 평화에 직결되는 국책사업은 어떤 고통과 희생이 뒤 따르더라도 반드시 건설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지역 어느 신문사 언론인이 주장하는 글의 내용 일부분이다.
그래 한번 말을 해보자!
당신이 태어난 고향이 막무가내 없어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말이다.
국책사업이란 미명아래 국익(國益)운운하며 당장 나가라고 쫒아낸다면 당신은 가만있겠냐,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자궁 속과도 같은 포근함이다 고향은 대대손손 조상들의 얼과 혼이 흐르는 곳이다. 고향은 어린 시절 동심이며 <빨. 주. 노. 초. 파. 남. 보>.무지개 빛이다. 고향은 마지막 찾는 길이고 영원한 안식처이다.
대추리도 그랬다.
노무현 정부는 넓은 운동장에 돌부리 하나만 제거하면 미군기지 건설은 아무 탈 없이 척척 진행될 줄 알았다. 지형(地形)상으로 볼 때 대추리 만큼 미군 요새로는 최적한 장소는 없었다.
대추리 마을 앞뒤로는 넓고도 평탄한 땅덩어리 평야<平野>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추리 마을 하나만 없애는 것이 바로 무기였고 끝내 무기<武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천만금을 준다 해도 평생 살아온 고향을 호락호락 내줄 수 있겠는가?
속된말로 뺏으려는 자, 지키려는 자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협상결렬로 이어졌고 대추리 사람들의 눈물과 비극(悲劇)이라 할 수 있는 대추리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치킨게임이었다.
3년 가까운 대추리 戰鬪는 말로 표현 못할 만큼 깊은 상처와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히 유감스러웠던 것은 경찰병력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부상을 입은 마을 사람들의 아픈 상혼이었다.
특히 마을사람들 간에 공동체 삶을 파괴해버리는 해당(?)관계자들의 치졸한 공작(公爵)은 비분강개를 넘어서고 말았다.
한마디로 오-엑스 <OX >퀴즈였다.
미군기지 반대자는 빨갱이 찬성자는 애국자로 양분하여 사람들을 이간질과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마치 대형교통사고가 나면 사망자와 부상자를 분산 시켜 여기저기 병원에 안치하는 것처럼 오순도순 살아왔던 동네사람들을 서로 편을 가르게 만들었고 반복과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해가 갈수록 쑥대밭이 되어버린 대추리는 더 이상 마을의 위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대추리는 전쟁에 지쳐 있었고 사람들의 人心에 피곤해 있었다.
下略
20여 년 전 조카가 근무하는 수원 삼성전자에 면회를 간적이 있다. 근데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허허벌판의 논 한가운데에 끝이 안보이는 어마어마한 건물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삼성전자 정문에서 후문까지 차로 10여분을 달렸던 것 같다. 그런데 정문과 후문에는 오밀조밀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작은 동네 2개가 군락을 이루는 것처럼 삼성전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게에 들려 궁금증을 물어봤다. 원래 마을이 조성된 곳에 삼성이 들어온 것이에요
아닙니다....
삼성이 있고난 후 동네가 형성되었다고 봐야지요.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
서로가 윈윈하는 방식처럼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조카는 삼성맨으로서 미국출장을 밥 먹듯 다니는 위치에 서 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나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업을 반대 하지 않는다. 다만 순서와 방법론 차이다. 매향리/ 대추리 /강정리/처럼 첨예한 대립과 논란구도를 만들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無人>그곳을 선택하고 지정했으면 하는 것이다.
예산이 더 들더라도 한번 돌아서가는 지혜를 가져 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무리 국가를 위한 안보 문제라고 해도 무조건 밀어 붙이는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선량한 주민들을 옥죄이며 하루아침에 마을들을 초토화 시키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삼성을 예로 들었듯이, 먼저 공장이 들어서니까? 공장 주변에 자연적 마을이 형성되고 상권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될 수 있는 한, 선과 후를 살피는 현명한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국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싸우는 政府는 말 그대로 情婦같은 존재다.
2006년 5월 어느 날 봄~~
장모님께서는 저를 찾으셨습니다.
사위 시간을 낼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야겠네,
집에 값나가는 고물들 많으니까?
한개도 남기지 말고 뜯어가시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침 그때 직장을 잃고 고물상을 막 시작할 때쯤이라, 앞뒤 재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고물을 뜯었고 챙겼습니다.
물론 대추리 일부사람들과 평화를 부르짖는 활동가들이 끝까지 남아서 투쟁하고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말렸지만 대추리 사태를 지켜본 저는 (마을 지키기) 보존은 어렵고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빨리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들 봐요.
대추리를 지킬 것 같아요.
이 게임을 이길 것 같아요.
셋째 사위입장에서 저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대추리에서 가장 먼저 이삿짐 보따리를 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장모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셨고 체념하셨습니다. 정나미가 떨어지면 발걸음을 재촉하듯이 장모님은 대추리를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고 중학생이던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했던 장모님의 한 많은 사연들을 잘알 것 같았습니다.
처갓집 식구들이 그렇게 많이 운건 처음 봤습니다. 저도 고물 값으로 받아온 70만원을 앞에 놓고 처량하게 울었습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작년 추석날입니다.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대추리를 찾아가 보았지만 온 사방은 철조망 둘러싸여져 있었고 요란한 공사현장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맞아!!
저기쯤이 대추리 분교야!!
그곳엔 대추리 역사가 기록된 타임캠슐이 묻어 있어!! 언제쯤 다시 꺼내서 볼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굴리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탄식하는 아내의 모습을 봤을 때, 내 마음은 한편 아려오고 시려왔습니다.
(절대 출입금지)
과연 미군들은 韓國 일반인에게 鐵門을 열어 줄까요?
*이주민 행복마을 전경*
아래 처갓집
호사가들은 엄청 떼돈을 받은 줄 압니다.
정부에서 제시한 법정가로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이주비용과 평택 근방에서 거주할 수 있는 특혜아닌 혜택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