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이것좀 보세요.
형이 쓰러지기 전에 쓴 편지예요
형수님께서 내미는 것은 형님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덩그러니 형의 메모 형식의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려 이내 덮고 또 펴고 반복하고 있었다.
불과 A4용지의 크기에 세장 분량의 글에는 형님의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글을 쓸 힘조차 없었는지
…….마무리 없이…….점점 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형님의 글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공을 잘 찼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학교대표선수의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 마음껏 공을 다룰 때가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남들보다 축구실력이 월등한 내 자신을 보며 다짐했다
내 꿈은 우리나라 축구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형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이미 스포츠 종목에 있어서 상당한 실력과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씨름 권투 배구 어떤 종목을 가릴 것 없이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4학년 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아예 교실에는 들어오지 않고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맴돌았다
오전에는 씨름 배구를 했었고 오후에는 축구 연습으로 공부를 대신했야만 했다
스포츠를 표방한 학교였기 때문에 학교의 기개와 명성을 드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목을 가리지 않고 혹독한 훈련과 연습을 반복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학교는 장흥군 대표로 차출되어 전남道 축구대회 나가 (3등)입상을 했었고 형은 유일하게 혼자 개인 우수상을 받았다
특히 형의 씨름 자랑을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씨름대회 우승은 밥 먹듯했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씨름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본인과 우리 형제를 지키는 무기가 되었고 재산이 되었다
속된말로 형은 어느 누구와 맞짱을 뜨면 한번도 져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축구로 대성하고픈 형의 꿈은 한낮 꿈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긴 병마와 죽음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집 살림살이는 어떤 나래를 펴고 꿈을 키우고 희망을 바라는 것은 妄想었고 奢侈였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은 이미 특기생으로 축구명문중학교에 입학이 보장되었지만 중학교를 밟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까?
먹을 게 없어 굶는 것은 다반사였고 나무껍질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하는 초근목피 생활을 해야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죽지 말고 언젠가 다시 만나 살자는 약속과 이별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엄마와 형은 네게 말했다
친척집에 가면 학교도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잘하고 있어
내가 취직하면 반드시 널 찾으러 오마
그때가 나이 11살 <그 과정은 내 어린 시절에서 밝혔기 때문에 생략하고> 14살에 비로소 형을 고향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서로 객지를 떠돌다가 만났기 때문에 그동안의 서러움과 기쁨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한참동안 우리는 서로 말없이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형은 단호히 말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형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내손을 끌여 당겼었다
그 말은 형의 영원한 다짐이었고 약속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형은 내 곁을 떠나본적이 없었던 거다
벌써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렸다
30년 전 <1980년>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 조치원에 왔을 때도 내 곁에는 늘 형이 함께 있었다.
정녕 이곳 회사에서는 나를 필요치 않았지만 형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최상이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모피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6개월 만에 집을 사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어머님을 모시고 형제를 불려 모으고 했던 분은 형 말고 세상에 또 있었을까?
4남2녀중 우리 4형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지역 사람들과 피나는 사투와 투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32사단이라는 부대를 끼고 있는 동네에서 살아 남으려면 목숨을 걸었고 다시 목숨을 걸었다는 말로 이야기하면 믿을 수 있을까?
이제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면서 살 수 있는 것은 형님의 자신감과 자존심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죽기 살기로 가난을 벗어 나가는 과정처럼 텃세가 심한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우리의 가족愛와 형제愛라 말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님은 우리형제들의 구심점은 물론이고 기둥이었고 '대들보'다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우리 형제들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으켜 세우신 분이다
나는 살면서 형님같이 굳센 의리와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을 본적이 별로 없다
형제들에게 한 번도 꾸중하거나 화낸 적이 없다
작년 아버지 벌초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물었다
형 내가 밉지 않았어.
내가 형한테 못할 짓 많이 했잖아
맞아
근데 네가 너무 불쌍해서 때릴 수가 있어야지
이제는 한번쯤 귀 싸대기를 때려도 되는데 다 부질없는 짓 같다
왜 부질없는 짓이야
그냥....
형님은 슬픔과 서러움을 오롯이 떠안고 사신 분이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15살 때 광주 충장로 모 제과점에서
일했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 3일동안 울고불고 난리쳤다
왜 그랬는지 몰라
자꾸 생각하면 창피해,
그리고 며칠 전 형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엄마 누나한테 잘하고 동생들 조카들 잘 보살펴라
운명이다
40년 전 나는 아버지를 땅에 묻었고 정확히 40년 후 형을 하늘로 보냈다
스스로 천국에 갈 거라고 유언을 남겼던 형님이 한편 안심이 되지만 왜 그렇게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숨을 거둬야 했는지
정말 따지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유감스럽다
형! 나는 말이야
나 죽으면 내 모습을 가족 말고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거야
형은 장로 직분까지 얻었는데 형의 죽임이 어쩌면 그렇게 참혹할 수가 있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
사랑하는 형!!
천국에 도달했어.
벌써 그립다
어느 날
엄마를 보내고 나면 분명 나도 뒤 따라 갈께
꼭 가야 할 이유가 생겼어
한번만 만나 속 이야기를 해보자
그때까지
형!! 편히 쉬어
1959년 9월XX ㅡ 2011년12월15일
PM 18시50분
형은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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