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집사람 고향이야기<대추리>

헤게모니&술푼세상 2012. 3. 1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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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내는 말했습니다

 

고향 갔다 올께

당신 고향 없잖아

..........

아참! 이놈의 입방정이…….

아내의 얼굴표정은 금세 굳어갔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습니다

 

미안해

집에 갔다 온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참..

고향사람들이 꿈속에서 보였어

다녀올게

그래

 

 

대추리.

대추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글자 그대로 대추(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대추나무골 동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연인즉 해방 전후 화전민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고 대부분 논과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소박한 시골사람들이었습니다.

20여년 전 초겨울 쯤 나는 대추리 첫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결혼을 허락받기 위하여 우린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결혼을 허락해줄까?

만약에 결혼을 반대하면 어떡하지

 

 

오만가지의 생각에 사로잡힌 내 마음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녀(衙內) 역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기차 창문 밖의 풍경을 주시할 뿐입니다

조치원을 출발하여 1시간 후 평택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서로 한 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그녀가 안 좋은 소식을 내게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마는 허락 할 것 같은데 집안 식구들이 결사반대야

어차피 한번쯤은 부딪혀야할 될 宿命이야

정 반대가 심하면 우린 쿨하게 헤어지는 거야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평택역에서 대추리행 버스를 탔습니다

행정구역상 대추리는 평택시 근방에 속해 있었지만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촌 마을이었습니다

버스가 한 시간쯤 아스팔트길과 신작로길을 번갈아가며 밟고 지나가자 비로소 저 멀리 대추리 마을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을 들머리(入口)에서 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철조망 페레이드가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큰 부대가 떡 버티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미군부대 k2 라…….

 

대추리 마을은 내 고향 마을과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이상(理想)스럽고 신비(神秘)스러움의 그 자체였습니다

동네 출입구는 대부분 한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었고 마을초입의 바로 옆에는 아담하고 예쁜 대추리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약간 경사진 언덕배기 동산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을 보니 어느새 엄마의 품속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마을 앞뒤로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광활한 평야는 내 마음이 탁 트일 만큼 고급스러웠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실제로 겨울철이면 황새들이 한바탕 너울너울 춤사위를 연출하기도 했었습니다

 

역시 장모님은 우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가족들은 전부 등을 돌린 상태였습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처갓집 가족들과 줄다리가 계속되었고 순간순간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까?

이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장모님께서 단호한 결정을 내려 주셨습니다

 

자네, 내식구들을 서운하게 생각 말게

결혼은 일륜지대사가 아닌가

둘이서 좋아한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나.

서로 부족한 것 채워가며 사랑하며 살아가게나.

결혼을 허락함세!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마땅히 내세울 것도 없는 속된말로<?>두 쪽 밖에 없는 나에게 선뜻 딸을 맡긴다는 것은 어느 부모라도 쉽지 않는 판단일 겁니다

당시 그녀는 소위, 잘나가는 직업인과 공무원들한테 직접적인 대시를 받아왔고 맞선도 많이 들어온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단칼에 거두절미하고 장모님께서 통근 결정을 내려 주신 것은 배포 있는 여자다움과 넓은 마음씨가 있었습니다

우리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우린 조치원읍(S)예식장에서 연기군 합창단의 화려한 축가 속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축하 하객은 조치원 사람들이 절반, 대추리 사람들이 나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고향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대추리는 내 고향이 되었습니다

처갓집이 좋았고 대추리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처갓집을 번질나게 드나들지 않았지만 해마다 명절이나 대소사 일이 생기면 빠짐없이 대추리를 찾았습니다

셋째 사위 왔는가?

어느새 대추리 사람들과는 술잔을 주고 받을 만큼 情과 人心은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대추리 사람들은 나의 아버님이셨고 어머님이었고 가족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더한 것은 장모님의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랑이셨습니다

장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내게 최상의 음식을 차려주셨고 특히 내가 가장 맛있게 먹는 코다리찜 음식은 별도로 챙겼다가 차려주실만큼 극성이 대단했습니다

 

사위가 이물없고 편해서 좋아!

많이 먹고 건강하시게!

 

정말이지, 내가 잘살고 못사는 것은 문제될게 없었습니다

그저 서로 이해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살라고 늘 용기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던 겁니다

나에게 한마디도 부정적인 말씀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아내보다는 장모님과 죽이 맞을 정도로 나는 장모님 사랑이었고 장모님은 사위 자랑이었습니다

더욱이 오죽했으면 사위들의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쓸 만한 옛날 집을 부수고 새로운 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때가 하필 IMF시기였습니다

평당 200만원이 훌쩍 넘는 액수에도 아랑곳 않고 강행을 했었습니다

집을 짓는데 1억 가까운 돈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 평수가 33평이었는데 방은 달랑 2개만 만들고 전부 거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족히 100여명은 거실에 앉아 음식을 먹을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물론 나중에 대추리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놀이터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처갓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

논밭 몇 마지기에다 그저 자식들이 벌어온 돈으로 살아가는 보통 집안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했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나의 삶과는 영 딴판으로 처갓집 식구들은 가난이란 자체를 몰랐고 보릿고개의 경험도 모르고 살아왔던 겁니다

젊은 나이에 故人이 되신 장인어른께서는

자식들 氣 안죽일려고 70년 초 대추리 마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먼저<TV>텔레비전을 사서 시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세상살이가 평탄하고 바르게 살수만은 없는 것처럼 처갓집의 가슴 아프고 질곡 있는 삶들을 어찌 다 토할 수가 있겠습니까?

 

10여년 전 일입니다

2002 월드컵 대한민국 4강의 여운이 한동안 가시지 않는 어느 여름밤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니 아내는 빛바랜 사진첩을 잽싸게 숨기며 등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훌쩍거리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울지 말고 얘기해봐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는지 아내는 찬찬히 말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집 가족사진을 보고 있었어

 

아버지와 동생...

 

아내가 피를 토하듯이 가슴에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끄집어 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미어졌고 먹먹했습니다.

 

내 중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마지막 차려드린 음식을 드시고 내 무릎에서 운명하셨어.

그리고 우리 가족은 원래 2남4녀야

뭐라고

처남이 외아들이 아니었어

둘째 남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사다준 튜브를.. 그날 바로, 평택 강에서 타고 놀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어

나는 아무래도(罪) 많은 사람이야

 

끝내 통곡하는 아내를 실컷 울어버리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가 참으로 짠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처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대추리 마을입구

 

                                                                                        미군부대에 둘러쌓인 대추리

 

                                                                                               대추리 마을 ,저멀리' 넓은 들녁

 

                                                                                              처갓집 사진

                                                                                         이곳에서 2남4녀가 태어났음

                                                                                    <유감스럽게 사진한장 남기지 못했음>

 

                                                                                                  *대추리 분교*

                                                                      이곳에서 처갓집 식구들과 공차기도하고 달리기도 했었는데...

 

대추리가 없어진대

서울에 있는(美軍)부대가 내려온대

뭐야

미군들이 온다고.....

 

그렇습니다

아내의 말처럼 해가 바뀌면 바뀔수록 대추리 눈물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대추리의 고통과 암운이 저 멀리 저미어 오고 있었고 말 못할 비극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ㅡ다음에 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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