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향 장흥군과 고향친구 장미란

헤게모니&술푼세상 2020. 8. 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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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내 고향, 장흥!
2010. 8. 26. 22:21

솔직히 나는 고향의 향수(鄕愁)는 별로 없다. 아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등졌고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왔기에 고향 산천의 그리움, 설렘, 동경심은 그리 숨가쁘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릴 적 소중한 가치와 경험들은 장구한 세월이 흘려도 내 가슴속 깊이 새록새록 남아 있다. 강원도에 가면 그림 같은 정동진 마을 풍경이 있다면 전라남도에는 정남진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내 고향 장흥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좀 더 고향 깊이 <주소>를 내비게이션처럼 찾아가 보자 ㅡ.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삼교리.ㅡ 큰 길가에 자리 잡은 삼교리는 U자 형 모양으로 간결히 정돈되어 있으며 고즈넉이 정감 있는 훈기를 뿜어내는 조용한 마을이다. 읍내 와는 가까운 마을이라 깊고 콱막힌 산골짜기의 촌구석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바라보는 고향의 풍광은 소소하고 예쁘고 정갈하다.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소나무 향기와 넓게 탁 트인 들녘을 바라보면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넓은 벌판 정중앙에는 전라도에서 몇 번째 손꼽히는 큰 저수지가 보이며 저수지를 넘어, 어느 마을을 넘고 넘으면(명산)천관산이 턱 자리 잡고 있다. 장흥에는 재암산, 억불산; 그리고 내가 다녔던 안양 국민학교 뒤편 사자산도 보인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망망대해 바닷가가 펼쳐진다. 이웃마을 사촌리 해창리 덕동리 수문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10여 키로를 걸쳐 바닷가를 끼고도는 드라이브 코스는 연인들의 필수과목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큰 백사장은 아니지만 수문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좀 더 차의 엑설 레이터를 밟다 보면 유명한 울포해수욕장. 보성녹차. 태백산맥 문학관 순천만 별교 음식을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염암 (월출산) 강진,(도자기).정약용(유배지),해남 땅끝마을과 (대흥사)를 보게 된다. 장흥에서 다 지근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장흥의 문화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장흥에는 문화예술인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정·관계 인사들은 재미없어 지면상 생략하겠다. 내가 책으로 봤던 소설가 한승원, 송기숙, 이청춘, 정병우, 김제현, 이승우外 몇 명을 꼽는다. 듣기로는 소설가 아동문학가 평론가를 포함하여 120여 명의 문인들이 장흥 출신이라고 한다. 군 단위를 통틀어 전국 최고다. 정말 나는 그 점이 자랑스럽다. 우리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가 있다면 내 고향 장흥이라고 말하고 싶다.

천관산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경을 잊지 못한다. 물축제.해양낚시공원.탐진강 생태습지. 제암산. 철쭉제. 억불산. 삼림욕장. 장흥댐. 등등 구경 다 끝나셨습니까? 이제 장흥 토요장터에 가서 장흥한우 표고버섯 키조개(삼합)를 쌈에 싸서 소주한 잔 들이켜 봐요. 세상의 천국이 따로 있겠습니까? 눈의 호강은 황홀함에 극치입니다.

계절 따라 나오는 별미음식! 매생이국. 전어회. 물회. 장흥 낙지. 갯장어. 맛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두 가지만 더 소개합니다. 첫째, 장흥 안양면, 소재 (우드랜드) 전국 최초로 알몸 산림욕장 <길이 3.5km> 개장(9월 중순)을 한답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족들을 위한 알몸 공간이 있음)

홀딱 벗고 편백숲에 피톤치드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지상낙원이 될 것입니다. 어감상 누드_나체라는 말은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답니다. 둘째 우리 고향 동네 앞 삼교 저수지를 적극 안내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보시는 추억을 가졌으면 해요.

일제시대에 만들었던 저수지 모양은 감탄할만큼 경이롭고 이채롭습니다. 동그란 원형에 잔잔한 물결들은 이내 포물선을 모으고 또 펼치고 저수지 가장자리에 연꽃들이 물안개와 함께 피어오르면 금세 우리 마음은 정화됩니다. 설렁설렁 걸어보시지요 약 40여분이 소요됩니다. 나는 고향 저수지 둑길을 걷다 보면 어릴 적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수지 명칭을 놓고 이웃마을 목단 사람들과 왜 그렇게 피 터지게 격렬하게 싸웠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쓴웃음이 나옵니다.

삼교저수지다/
목단저수지다/

비약하고 협잡하기 이를 때 없는 사제 화살 사제총, 새총, 각종 무기들이 이곳저곳에서 돌멩이와 함께 날아들고, 님비현상은 참 가관이었죠. 그러나 이런 아픈 기억보다는 맑고 깨끗한 냇가 물에 친구들과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고 마음껏 뛰놀던 어린 동심을 잊지 못합니다. 나에게 있어 귀하고 귀한 노란 참외를 한입 물고 휘영청 달밤에 친구들과 노래도 하고 술래잡기하며 몹시 재미있고 즐거워했던 그 시절 그 추억을 오롯이 담아봅니다. 中略...

아~ 나의 아름다운 어린시절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통이 호사다마였습니다. 박복한 내 운명이었어요 내 나이 겨우 11살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가난한 삶의 굴레는 나를 미쳐있거나 죽어있던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게 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내 눈에 눈물을 버벅이 안은 채 고향땅 장흥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힘에 의해 ......강제로......

지금 나는 두서없이 내 고향 자랑과 추억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때 잔인한 이별의 순간들은 아픔과 슬픈 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고향 장흥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면 무미건조 무색무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내 고향 장흥 한번 들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상의 탈출은 되실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부산여행」…2020년 8월8일…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그립고 애틋한 곳이다. 해서 고향을 어머니의 신비한 자궁과도 같다고 했다.?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고향산천에 묻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10년 전에 나는 무덤덤히 고향 이야기를 써 내려가듯이 몇 시간 후면 빛바랜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어린시절 코흘리개 추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 고향ㅡ불알친구 장미란....

우리는 60년대 초반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앞집(이웃)을 마주 보고 태어났다. 미란이 아버지는 동네 이발사 었고 나의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대서소를 운영하였다. 두 집은 운명처럼 빼닮은 꼴이 있었는데 이발사, 그쪽은 1남 6녀 식구가 있었고 대서소, 이쪽은 4남 2녀의 식솔이 함께 했다. 두 가족은 아들 부자와 딸부자로 동네방네 소문이 났지만 한편 끼니 걱정에 눈물 마를 날 없는 비참한 가정사를 안고 있었다.

모진 가난은 우리들을 꿰다 놓은 보리 짝처럼 주눅 들게 만들었고 급기야 멀쩡한 몸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의기소침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면 머리가 노랗게 탈색되어 빙빙 돌았고 거울 속에 얼굴을 바라보면 누렇게 떠서 피골이 상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씨와 곽씨 집안은 그 흔한 전답도 없이, 대지 한 평 없이, 마지못해 헉헉대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란네는 몇 십원하는 이발료로 모진 삶을 지탱했고 우리네는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찰나였다.

초근목피가 계속되던 어느 날, 우리 아버지 얼굴에는 저승꽃이 피웠고 끝내 요량잡이의 곡소리가 마을 산천에 퍼지고 있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가을이 오는 길목에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쌀쌀맞게 나를 대하셨다.

순천으로 가라/
굶어 죽지는 않아/

엄마는 가기 싫다는 내 어깨를 모질게 흔들며 자꾸 등떠밀었다. 허기진 배고픔을 잊고자, 앞 동네 개천에 나가 물장구치고 때론 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하염없이 단물을 빨고 휘영청 달밝은 밤에는 과일 서리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내 짝꿍 미란이는 맨발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어디를 가든지 잘살아.~
우리는 언제 꼭 만나자.~

느릿느릿한 부산행 우등열차가 내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김천역이 잠시 정차하자, 인생의 별곡처럼 시시비비 긴 한숨과 회안이 금세 밀려온다.

아야 울지 마라.
배 꺼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어떻게 살았었니.?

가난한 아버지를 둔 우리들은 숙명과도 같이 맨땅에 헤딩을 했고 인생의 연기자처럼 미지의 세계를 헤쳐나갔다.

이루고 싶었던 꿈~
달성하고 싶은 목표~
다다르고 싶었던 귀착점~

그러면서 가난은 잠시 불편하다는 개소리에 제동을 걸었다.

가난은 죄악이고 비극이야.
가난은 배고프고 서럽다고
가난하면 소외당하고 무시해
가난하면 고독하고 생을 마감해
가난하면 부모 형제와 친구도 없어

그래 가난의 굴레는 내 대에서 과감히 끊자.
절대 가난의 멍에를 자식에게 물러주지 말자.

부산역에 도착하니 잿빛 하늘은 금세 먹장구름으로 변하고 순간 우르릉 쾅쾅 세찬 비가 되고 만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인가? 미란아! 조금만 기다려? 쉽게 멈출 줄을 모르는 빗줄기를 뚫고 미란이와 만나기로 했던 구포역에 도착했다.

흡사 옛날 조치원 역사와 닮은 구포역 한 귀퉁에서 달려 나온 여인을 마주치니 단번에 미란이의 옛 모습이 그려진다. 단박에 우리는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끌어안았다. 나쁜 계집애 아직까지 살아 있었구나.^^ 기종아! 너에게 옛정취가 스치듯 보인다.

우리가 이처럼 생생히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세대의 아이들과 전혀 다르게 제법 눈치 있고 똘똘하고 영악스러웠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구포역 2층 계단에 털썩 주저 않아, 켜켜이 흘러버린 세월을 소환하고 있었다.

미란과 나는 질긴 이야기 보따리를 그림책 펼치듯이 풀어내자, 서로는 한숨과 한탄과 비명소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 형과 나이가 같은 애란 누나와 그리고 우리 막내와 동갑인 숙희가 세상 떠난지도 20년이 넘었단다.

그래! 죽음은 순서 없이 가더라.
아하~ 어떻게~ 어떡해~ 에효~

어쩌면 49년 전이나, 지금이나, 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변한 게 없니.? 10년 전에 이승을 등진 큰형도 가끔 애란 누나를 찾고 했는데 말이야... 우리는 사람이 붐비는 역에서 빠져나와 허름한 선술집을 찾았다. 반가움으로 만나야 할 지금의 자리가 온통 눈물바다인 양,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면서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느려뜨렸다.

계집애! 우리는 누구보다 서러움을 이겨내며 잘 참아왔어? 너는 고생을 머리에 이고....나는 고생을 등허리에 지고... 그 과정은 잘 알기에 흔하게 눈물을 공개하지 말자. 맞아! 그런데 너를 보니 아무 이유 없이 솟구치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제까지 고생과 역경,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 기종아~ 네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에 그냥 누선의 자극처럼 눈물이 쏟아진다고/ 나는 살며시 미란이 손을 잡고 애써 술집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지막 알고 싶었던 것을 묻고 있었다.

남편은ㅡ? 묻지 마라.!
애들은? 밥벌이한다.!

미란이의 녹록하지도 평탄하지도 않는 삶이었던가? 미란이의 그렁그렁한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이내 눈길은 나처럼 애먼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의 11살 머슴살이와 탈출, 서울로 야반도주, 서울 선데이생활, 구로공단 공돌이, 삶의 체험현장은 미란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비교할 수도 비견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더 이상 미란이의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양동이처럼 내리치는 비를 맞으며 그가 가고 싶어 하는 해운대를 찾았다. 미란이는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40여 년을 살지만 바닷가는커녕 태종대도 가보지 못했다/ 지금도 직장생활에 얽매이다 보니 한가한 여유가 괜스레 사치로 느껴진다/ 그만 직장을 멀리하고 싶은데 답답한 일상들이 가만 두지 않는다/ 나는 미란이의 슬픈 고백에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미란아!
왜 해운대야?
몰라~
해가 울어서 그렇대.
그래서 지금 비가 오는구나.

1박 2일 미란이와 함께 했던 부산투어는 내 인생에 있어 절대 잊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비록 힘든 삶의 여정을 살아왔지만 꿈과 희망을 비빌 언덕이 있었고 반드시 희망과 용기로 세상을 도전하면 그 결과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성공으로 되갚는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목표했던 만큼 아니어도...

내 마음속에 늘 보석상자처럼 간직했던 내 친구 미란에게 말했다. "너는 세상천지 다정한 목소리를 가졌구나." "목소리가 롤러코스터 마냥 높낮이가 없이 매우 안정적이고 고정적이야." "말씨, 솜씨, 맵씨도 잘 가꾸며 살아왔구나." 기차 플랫폼을 밟고 기차 안, 지정석까지 안내하는 미란에게 악수를 청하며 굳은 약속을 했다.

추석 쇠고 세종에 온나?
너에 이름을 찾아주마!
장미란~~~..

부산 추억이 많다.

전라도 여성보다 경상도 여성이 매력적이다.

해운대 조선비치

소녀처럼 곱게 늙어간다.

모래 위에 이니셜을 그렸다.
S

해운대 유명한 보쌈집

친구는 평생 술 한잔하지 않고 살아왔단다.

마늘보쌈, 또 먹고 싶어 진다.

호프주인장께서 카메라를 흔들렸어 ㅎ

처음 만나, 첫 번째 사진인데~~

배려와 양보가 매우 깊은 친구다.
우등에서 KTX 기차표로 바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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