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제5 공화국 집권시절은 말 그대로 세월이 하 수상했다
동네에서 조금 껄렁거리며 논다는 것 이유 하나로 내 친구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전과의 과오가 있다는 것 때문에 내 직장의 동료는 늘 독약(일명 싸이나)을 품고 다녔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독약을 입안에 털어 넣겠다는 심산이었다
철권통치 앞에서 민초들은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수식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언론은 보이지 않았고 언로는 막혔고 여론도 없었다
오직 말조심 속에 눈과 입과 귀를 닫고 살아야 했다
행여 國政에 대하여 바른말 옳은 행동을 했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무슨 배짱이고 호기였을까?
82년 새해 첫날부터 내 직장 부서 벽면에다 A포 용지 크기만 한 두 인물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고 보란 듯이 일을 했었다
그 인물들은 다름 아닌 ys와 DJ였다
당시 ys 사진은 눈 감아줄 정도로 맑은 공기가 회사 내에 있었지만 그것도 다름 아닌 DJ 사진을 아량곳 없이, 아무 탈 없이 붙여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런 나의 돌출 행동에 회사 오너와 상사 그리고 동료들은 큰 염려와 걱정들이 있었지만
나는 한술 더 떠서 두 분 사진밑에 "반드시 이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큼직하게 적어 놓기까지 했다
죽을 각오로 이렇게 까지 했던 것은 어둡고 살벌한 시대의 억울함과 분노가 한몫을 했지만 어느 날 `시사(政治) 책을 읽다가 눈에 거슬리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영국의 모 기자가 한국觀을 단적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내게 있어 망발이었고 수치스러움이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당시 두 분은 민주주의 상징이었고 희망이었다
YS. DJ 사진을 걸어놓고 내가 신격화 우상화 한다는데 누가 말릴 성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정치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책을 통하여 두 사람의 정치관 역사관 철학관 등을 느낄 수가 있었고 배울 수가 있었다
서로 정치 색깔은 확연히 달랐지만 두 분을 통해서 여봐란듯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빌곤 하였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 국민들의 기대와 바람을 저 버린 양金 씨 단일화 실패... 3김씨의 각자 대선 출마를 결정 지었을 때 너무 아쉽고 속상한 맘은 한이 없었다
하지만 87년 대선이 다가 오자 나는 누가 나오더라도 양金(ys.dj)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먼저 대통령이 되면 좋을까?
이왕지사 누구를 먼저 지지하고 성원을 보낼까?
이 대목에서 나 자신이 솔직하고 정직해 보자
나는 망설임 없이 DJ를 택했다
여러모로 보나 대통령감은 `후광`이었다
거산`처럼 정치는 감으로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전라도 태생이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이다
분명 말하지만 나는 전라도 사람이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이다
나는 사람됨됨이(인물) 보고 투표하는 사람이지 지역을 보고 투표하는 소아병적의 오합지졸이 아니다
한마디 덧 붙이면 나는 進步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착한 保守를 매우 신봉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나는 그 길로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 여의도 청년동지회를 찾아 (평민당) 당원이 된다
비록 87년 대선 결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만
한 정당의 당원으로서 DJ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조치원 지역에서 공개적으로 DJ 열성당원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87년 11월 어느 날 유세차 DJ가 조치원역으로 왔을 때 조치원 시내는 초비상 상태였다
전경들은 골목마다 방패를 들고 서 있었고 조치원 평민당 사무실에는 고작 20여 명의 당원들이 있었는데 감시와 미행은 반복되었고
나는 숨바꼭질 하듯해서 간신히 역전 유세장에 나타날 수가 있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DJ와의 만남과, 덕담 그리고 DJ 싸인 한 장을 잊을 수 없다
DJ께서 연설을 끝내고 어느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초대 인원은 10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고려대 학생 5명 당원 5명 그중에 나는 포함되었고 특별히 나는 DJ와 마주 보고 식사하는 영광을 가졌다
비록 30여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른께서 손을 잡으며 "젊은이들 반드시 민주주의 꿈을 이루자"라고 말할 때 마음 한편 뭉클해 옴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경호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네게 유일한 싸인 한 장을 해 주셨는데 한자로 쓴 金大中이라는 세 글자뿐이었다
(사인을 찾아서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 시간여 책장을 살피고 책갈피를 넘겨 봤지만 도통 보이지 않는다)
알다시피 DJ는 92년 세 번째 대선 도전을 해 보지만 실패하고 은퇴선언 다시 번복 정계복귀
<97년 4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15대 대통령 당선>
지금 생각해 보면 DJ의 궤적은 파란만장한 것이었고 일평생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민주주의 정치를 위해 치열하게 살다 간 정치인이 아니었나 싶다
민주주의를 한 차원 승화시킨 역사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삶 속에 진정 `슈퍼스타`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겠다
ㅡ서거 2주년 맞이하여ㅡ
독재자에겐 功過는 없다 독재만 남을 뿐이다 <헤게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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