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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하나]
2011년 대학을 갓 입학한 20살 짜리 아들은 어느 날 가족들과 저녁식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데, 뜬금없이 "사전입대"를 신청했다고 통보한다.
나는 무덤덤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집사람은 대학 새내기가 캠퍼스와 학과의 분위기를 적응하고 난 후, 군대를 가도 늦지 않는데 왜 이리 서두르냐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엄마! 국방의 의무는 빠를수록 좋고, 매를 맞아도 먼저 맞는 게 낫다며 농을 던지며 여유까지 부린다.
군대를 간다는데, 자식을 이기는 부모의 모양새가 영 아니다 싶어 나는 집사람을 달래며 아들에게 네 뜻대로 입영날짜가 정해지면 후회 없이 성실하게 군복무를 했으면 좋겠다.
몇 달 후 아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찰나의 순간이 다가왔고 잠시 가족과 사회와 생이별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아들은 엄마에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군대생활하겠다고 충성을 외치며 집을 나섰지만 집사람 마음은 가슴이 미어터지고 먹먹했나 보다.
아들의 논산훈련소 입소장면을 동행했던 친인척의 말을 빌리면 집사람이 그날 하루 흘린 눈물의 양이 하늘과 땅보다 더 높고 넓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제는 아들을 군에 보내고 삼일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끙끙 앓으며 식음전폐를 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일주일 만에 집에 택배가 도착했는데 아들의 "애지중지" 손때가 묻은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으로 이어지는 집사람의 불쌍한 모습을 봤다.
그때 나는 집사람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만 화가 나서 또다시 걸어 잠긴 방문을 대고 큰소리쳤다.
아들이 군대 간 거지?
죽으러 간 게 아니잖아!
이봐! 정신 차리라고...
외아들이 우리 집에만 있나?
그나마 그해 논산훈련소는 몇십 년 만에 내영면회가 부활되었고, 컴퓨터 인터넷으로 아들의 병영생활과 훈련모습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아들은 무사히 2년여 동안 군복무를 마치고 본인이 전공했던 외식조리학과로 복귀했을 때, 어린애처럼 마냥 좋아하고 신이 난 집사람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자식을 의무적으로 군대 보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분단현실에 마음이 착잡하고 답답했다.
[장면-둘]
1980년 7월경, 큰형과 나는 서울 구로공단을 버리고 충남 연기군 조치원역에 도착한다.
연기군 서면 봉암리에서 렉스모피를 경영하는 대표이사께서 전국의 모피업계 <국제보세&진도모피>를 주름잡고 제법 명성이 자자했던 큰형을 상당한 보수를 주며 스카우트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형제는 아무 연고도 없고 생소한 이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에, 뜻하지 않는 대형 물놀이 사고가 일어난다.
1984~5년쯤으로 기억된다.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에 금강을 타고 흐르는 봉암 하천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초등학교 여섯 명이 익사했다는 비보가 마을 이장의 스피커를 통해 전체를 알린다.
앞뒤 잴 것 없이 우리 공장에 근무하는 젊은 남자 20여 명은 직선거리로 300미터에 있는 사고현장을 향해 냅다 달렸다.
며칠 동안 장맛비가 내린 탓에 실종자 찾기에 무척 어려움이 따랐지만 우리는 물살을 가르며 곳곳을 훑터가면서 강가를 수색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골든타임은 지나버려, 어린이들의 시신 수습으로 전환했고 마침내 공장사람이 죽음으로 발견된 한 명을 건져냈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사나운 물살에 휩쓸려갔는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봉암리에는 사단급 규모의 큰 부대가 있었는데, 군특공대원들이 총출동하였고 119 구급대원과 경찰들은 사고지점에 "위기대응센터" 지휘부를 차리고 익사자의 인양에 골몰했다.
무려 이틀 동안 샅샅이 수색한 끝에 나머지 희생 어린들의 시신을 부모 품으로 돌려보내지만 그때 이틀 동안 사고현장을 지켜본 나는 일사불란하게 빈틈없이 움직인 군 사단장과 수색대원들의 용맹스러움에 감사의 표시로 최대한 머리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희생된 어린이 대부분이 내가 봉암중앙교회 지도교사로서 주일마다 성경공부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 중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할 때는 나는 한동안 찢어지는 아픔과 슬픔이 가시질 않았다.
연기군 봉암천 물놀이 사고는 KBS 메인 9시 방송에서 톱 뉴스로 다룰 만큼 전국적인 관심사였고 국민들께서 심심한 위로와 조의를 보내주었다.
사고 원인은 어린이들이 강물 속의 빠른 유속을 모르는 체, 헤엄을 치다가, 곧바로 떠밀려 내려가고 더군다나 바닥에 곳곳에 모래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으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면/MBN 뉴스파이터
[장면-셋]
수해복구 <대민봉사>와 실종자 수색에 비지땀을 흘린 해병대 병사가 성난 급류에 "속수무책" 희생되고 말았다.
살려주세요.....!!!
이 한마디를 남긴 체 말이다.
어떻게 하천의 강물의 겉과 속을 파악하지 않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 몰았을까?
그것도 귀신 잡는 해병/
물불을 가리지 않은 무적해병/
물의 <유속>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해병대 지휘부가 20살 해병대원을 죽음의 강으로 안내했냐는 것이다.
나사 풀리고 얼빠진 해병대 수뇌부들아!
멍청하고 모지리 한 어느 단체장이
내가 지하차도에 갔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망언처럼, 병사가 조끼를 입었어도 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할 텐가?
그는 영원한 해병이다.
구명조끼만 입었으면 살아있었다.
구명조끼를 착용했으면 어떤 부유물을 잡든지 헤엄쳐서 강 끝으로 나오고도 남았다.
해병대 간부들의 몰염치와 몰상식과 몰이해가 비상식적이다.
군의 기강 해이가 엉망인데 안전 매뉴얼의 수칙이 있긴 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판단으로 비극적인 참사를 불렀다.
꽃다운 나이
못다 핀 꽃....
외동아들이에요
우리 아들 보낼 수 없어!
이제 아들 없이 어떻게 살라고, 사랑스럽고 기쁨을 준 착한 아들이었는데...
이게 뭐냐고요.
왜 이렇게 우리 아들을 허무하게 가게 했냐고요.
피눈물을 쏟으며 끝내 아들의 영정사진 앞에서 실신하고 마는 채수근 상병의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시 못 올 청춘이라는 생각에...
내 조국은 평생 기억해야 한다.
채수근 상병과 그의 부모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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