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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vchosun.com/mobile/svc/osmo_news_detail.html?contid=2020052690170
어젯밤은 KBS를 마다하고 TV조선 뉴스를 시청했다.
나는 배고픔의 서러움을 몸서리치게 잘 아는 사람이다.
애야! 자리에서 뛰지 마라.
허기지고 주린 배 꺼질라!
1971년 어느 날 내가 세상 밖으로 버려졌을 때, 유일하게 입에 달고 살았던 두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엄마"였다.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 (11살) 그 시절과 그때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당시 찢어지게 가난한 굴레와 무게는 너무 참기 어려운 서러움이었고, 한편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숙명"과도 같았다.
11살에 어느 친척집에서 머슴살이/ 12살에 청계천 봉제공장/ 13살~19살까지 떠돌이 객지 생활/ 20살부터 현재까지 노동자와 개인사업/ 등등~ 반평생 넘게 수많은 고생을 머리에 이고 살아왔다.
몇 년 전 나는 한겨레신문에 내 흔적을 적나라하게 인터뷰를 했기에 또다시 여기에 덧칠하고 싶지 않다. 사이트에서 한겨레신문을 검색해보시라.
이용수 할머니께서 정의연팀(윤미향)에게 배가 고프다고 밥 좀 사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이것은 아니다" 천하에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종자들이다. 어떻게 할머니를 모시고 위한다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돈 사비로 밥 한 끼 사드릴 수는 없었단 말인가?
다시 거듭 강조하지만 나는 비록 위안부 할머니들보다, 깊고 깊은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지는 않았지만, 배고프고 굶주림에 눈물을 달고 산 사람이다. 해서, 가난은 인간이 가져서는 인될 비극이고 죄악이다고 생각했다.
1977년 7월 8일 서울 무교동 보리수 제과점에서 큰 화재사건이 일어났다.(조중동 _대서특필) 나는 가스폭발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서서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었다. 그 와중에 나도 모르게 내 보상금을 빼간 사람이 있었다. 내 금전적 문제는 다 해결해준다고 해서 전적으로 믿고 따랐는데 뒤통수를 쳤다. 이 사실을 알고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 내 몸뚱이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곧게 뻗은 이유가 있다. 저잣거리 자판을 보면,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돈은 없고 그렇다고 도둑질은 못하겠고 그래서 하염없이 거리 음식에 목을 내밀다 보니 (키만_큼)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난 누구한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나름대로 양심껏 성실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기에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을 놓치지 않았다. 개인과 단체 포함해서 기부와 후원한 돈이 약 3천만 원이 넘는다. 이제는 남을 도우는 일들은 심각하게 고민해 보겠다.
이제 17명의 위안부 할머님들은 이승에서 저승꽃을 부르고 있다.
정의연 사태를 보면 진심 안타깝고 슬프고 왠지 모를 분노가 치민다. 우리 불쌍한 이용수 할머니를 향해 진영대결과 지역혐오로 매장하고 조롱과 악담으로 비난하는 특정세력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그렇게 살지 마라.ㅡ
삼대가 죄 받는다.ㅡ
뭉크의 절규가 으스스하게 다가오는 5월의 마지막 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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