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파트ㅡ 층간소음 문제가 심각하다.

헤게모니&술푼세상 2019. 5. 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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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ㅡ길면 읽지 마세요※

 

아침상을 차려주는 집사람을 살짝 보니 얼굴이 둥글둥글하다. 어라~ 밥그릇도 국그릇도 반찬통도 둥글다. 숟가락을 들고 입술을 여니 입구멍도 둥글다. 식사를 마치고 항문을 열고 응가를 하니 잔재물도 둥근 모양이다..

 

살아생전 아버지와 엄니는 나에게 잔소리처럼 간곡히 신신당부를 하셨다. "너는 욱하는 못된 성질만 고치면 좋겠다./ "어떤 일이 닥쳐도 꾹 참고 둥글둥글하게 살아라./ 얼마나 내 성격이 포악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어린 시절에 고향마을 공동우물에다 이물질 집어넣기 <음료수병과 청개구리>를 태연하게 실행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나는 죽자살자 달리기 시합을 했다. 겨우 일곱+여덟 살이었던 내가 20대 후반 엄마에게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동네 한 폭판 둥구나무에 내 몸을 동아줄로 꽁꽁 묶으셨다.

 

그려면서 하셨던 말씀이 이것은 "청개구리 심보에 대한 죄와 벌이다./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루라는 명령이었다./ 보통 2시간여를 나무에 꼼짝없이 매달리며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니 소문난 명물이 따로 없었다. 당시에 우리 집은 잡동사니 점빵을 운영했는데 내가 벌을 받고 나면 엄마는 내게 슬며시 주셨던 것이 타는 목마름을 해소하는 음료수였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마라.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음료수를 벌컥 들이마시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달려요?

이 녀석아~

난 100미터를 18초에 달린다.!

 

세 살 버릇은 오래간다고 했던가? 안 했던가.^^

3년 후, 아버지가 세상 떠난 그날까지 엄마와 나는 치열한 줄달리 기는 계속되었다. 매를 맞더라도 엄마가 내민 음료수 맛을 절대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둘째인 나는 군것질과 용돈이라고는 전혀 없었기에 반발심과 어깃장으로 일부러 사고뭉치로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턱없이 부족한 가난의 굴레는 스스로 나를 아웃사이더와 낙오자 신세로 몰아버린 반항아 세상이었다고나 할까?

 

시대를 넘고 나이가 꽉 찬 내가 유독 키가 180센티가 넘는 이유는 유전자 탓도 있지만 먹성 좋은 나이 때 먹지 못하고 산해진미 음식을 눈이 빠져라 목매달다 보니, 옆으로 퍼지지 않고 양복이 어울리는 몸매가 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옷걸이가 좋으면 뭐하냐? 쓸데없는 몸뚱이인데^^ 말이지 말이다.

 

어린 시절처럼 성질 좀 부리고 소도둑이 되었으면 지금 영양부족과 정력 부족은 없었을 텐데~너무 착하게 살아왔던 것이 약간의 회의와 미련과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족이 길어진 것 같아, 본론으로 들어가자.

 

언제나 일상이 되어버렸듯이 성냥 값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인해 이웃 간의 흉악한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 일주일 전 우리 세종시에서도

층간소음 때문에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이 일어났다. 심각한 중상을 입은 피해자가 의식을 되찾고 집중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다.

 

lmf <한국 구제금융> 위기 때 우리 집은 천운인지 몰라도 질풍 노드처럼 승승장구를 하였다.

탄탄한 회사 <내판-어묵공장, 고려대- 구내식당>에 몸담은 행운이 한몫을 했지만, 이왕 사는 것 자식에게 가난만은 대물림을 하지 말자는 굳은 각오가 있었다.

 

전재산이 500만 원에 불과했던 우리 맞벌이 부부는 3년 만에 1억 원을 거머쥔 놀라운 현실을 보여줬다. 거액을 놓고 나는 신대리 땅을 사자.

좀 더 남의 집에 살고 4000평 그 땅을 사면 우리는 떼부자가 될 수 있어, 내 판단과 예지력을 믿어봐?

 

세종특별자치시는 꿈도 꾸지 못한 시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이 지역 연기군은 큰 변화가 올 것 같았다. 아니야! 9번 월셋집과 전셋집을 전전하며 우리는 전전긍긍했어. 그동안 집 없는 설움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 집사람은 일언지하 거절하며 조치원 새 아파트를 택했다.

 

내 집 마련한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파트 거실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버린 집사람의 슬픈 자화상을 말이다. 심장을 도려내듯이 내 마음이 짠하고 먹먹할 정도였으니까?

 

그래 이 순간을 즐기며 악착같이 살아가자. 다독거리며 생소한 아파트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파트의 오아시스 같은 즐거움도 잠시, 위층 아래 층간의 소음 분쟁 때문에 입술이 타들어가고 피가 마르는 날이 계속되었다. 쿵쾅 뛰는 발걸음과 의자 끄는 소리, 피아노 연주,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위층 16층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래, 공동체 생활하는 벌집에서 톡 쏘는 말벌은 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욱하는 성질을 인내하고 또 참았다. 그러나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낮에 잠을 자고 밤에 일을 시작하는 나로서는 이미 이성이 마비되고 말았다. 당장 쫓아가 언성을 내며 항의했더니, 도리어 그 정도를 못 참으면 이사 가세요. 곧바로 문을 닫아버린다.

 

이것 봐라~~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게 싸가지를 밥말어먹었나? 그래도 내 딴에는 고운 말로 알아듣기 쉽게 시정을 요구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더럽다" 이거지. 솔직히 얼마나 권토중래를 했는지 모른다. 저 집을 어떻게 박살 내버릴까?

 

그러는 찰나 아래층 14층에서 우리 집으로 항의가 들어왔다. 우리 애들이 거실뿐 아니라 앞뒷 베란다에서도 시끄럽게 뛰며 소리를 지른다는 충고였다. 머리를 최대한 숙이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

순간 내가 위층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운 게 매우 한심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누굴 원망하고 탓하리오, 나는 그날부터 세 가지를 실행했다.

 

우선 관리사무소를 찾아 각동 엘티 안에다 공고문을 써서 붙여라. 소음으로 이웃 간에 다툼이 많다. 쾌청하고 유쾌한 아파트 환경을 만들어달라. 당신들의 당연한 책무가 아니냐.?

 

초등생인 아들 딸에게도 오늘부터 절대로 뛰지 말고 까치발로 다닌다. 앞으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 아빠가 용서 안 한다. 아파트 안 놀이터에서 놀아라. 애들이 주눅이 들도록 득달을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는 어묵 5킬로짜리 한 박스를 들고 위층 아래층을 오가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결과물은 적중했다. 몇 개월이 지나니 이웃사촌이 되었고 우리가 사는 20층, 동라인 사람들과 모임도 하고 벤치에 앉아 기타 치며 흥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는 박스 어묵이 통째로 나오면 경비실-관리사무실-침산동- 노인정까지 인심을 후하게 쓰는 쓰나미가 일어났다.

 

아무리 언짢고 화나는 일이 생기면 한번 긴 호흡을 가다듬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친절히 대하면 이웃 간의 다툼과 분쟁도 잦아들고 평화가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참을 인, 세 번을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다..

 

우리 딸,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체육대회를 갔었다.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100미터를 5명이 뛰는데 뒤에서 1등을 하는 모세의 기적이 왔다.

 

꼴찌.

애야~ 32초가 뭐니?

고등학교 때는 29초

딸아이가 내게 했던 말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까치발로 살라고 했잖아.

그래서 달리기를 못해...

 

4년 전 전설의(?) 아파트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아파트"^ 삼행시를 썼다.

 

#아수라장

#파란만장

#트라우마

 

그리고 전국에서 자살 명소로 유명한

그 아파트를 2 행시로 마무리했다.

 

#욱해서 참지 못하고

#일자로 떨어진다고

 

엄마가 나보고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이제는 잘 안다...

 

해와 달도 동그랗고 지구도 둥글고 모든 사물들이 둥근 게 많다. 아침에 들고 온, 우유 통도 둥글고 점심에 신라면 포장지를 뜯으니 알맹이가 둥글다.

 

인간이라면 알맹이가 되어야지 쭉정이가 되어서 되겠는가?....ㅡ......

언제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인생으로 살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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