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음력> 내 생일날에 아버지가 그립다.
아침 새벽부터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항상 피곤에 쩔어 있는 집사람이 여러 음식을 지지고 볶는다. 내가 좋아하는 무생채와 갈치구이와 쇠고기가 들어간 미역국과 햇밥이다. 둘이서 마주 보고 겸상하기는 오랜만이다..
아침이면 잔소리와 지청구가 심한 집사람인데.~<돈과 술>^^ 오늘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반려견 양파도 그 어느때보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떤다. 365일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어쩐 일로 한마디 한다. "엄마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아부지....
9년 전에 형의 슬픔을 느끼며 눈물로 써 내려간 글이 떠오른다. <길면 읽지 마세요^^>
언제 이 글을 공개한 적이 있지만, 지금 잠깐 더 살을 붙인다면 나의 유년시절, 아버지는 삼시 식사 때가 되면 우리 가족들과도 겸상은 물론 두레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고달픈 손놀림은 아버지 독상에 집중했다.
아버지의 밥상 타령과 반찬투정은 지독스럽게 남달랐다. 그러나 자식들 생일날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식사를 허락해주었다. 특히 아버지는 당신이 손수 사용한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우리 식구들에게 그 어떤 반찬과 요리를 집어서 밥공기에 넣어주지 않으셨다. 어린 나이에 그 점이 속상하고 서운했지만.....
이제 내가 나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당신의 몸에 자리한 병균이 옮길까 봐?
집사람의 생일상을 받고 보니 갑자기 아버지가 목매 이게 그립고 보고 싶어, 잠시 고개 들어 그렁그렁한 눈물을 감추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표독스러운 가난 때문에 말 못 할 고통과 시련이 내게 닥쳐왔지만, 초딩이 뭐냐? 중딩이 뭐냐? 고딩이 뭐냐? 대딩이 뭐냐? "맨땅에 헤딩은 하고 살지 않았나?"
이토록 무난히 잘 견디며 잘 살아온 이유는, 아버지와의 세심하고 소소한 추억의 결과물이 아닐까?
??
아버지 내 아버지....
2010.10.25 01:35
가끔 생각해본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아부지 내 아버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세월이 짧은 만큼 이제는 아버지의 모습과 기억은 자꾸 내 머릿속에 하얀 지우개가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향기와 냄새가 그립다..ㅡ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초봄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부르시더니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셨던 귀한(애마) 삼천리자전거 뒷 자석에 타라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 형제 중에 아버지 허리품을 안고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보였고 특혜였다.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고 보수주의자 적인 사람으로서 말 한마디에도 격조가 계셨고 행동에서도 절대 빈틈이 없는 근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였다. 냉철한 승부사 기질을 가진 절도 있는 아버지셨고 호불호가 정확하셨다.
그것은 직업의 흔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경찰관이셨다. 말단 순경이 아니라 직급이 높은 경찰이었다. 너무 어린 탓일까? 아쉽게도 나는 경찰 제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할 수가 없다. 사진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었지만 잘생긴 외모와 큰 키에 제복이 잘 어울리는 아버지의 멋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깊어가는 병마는 경찰제복을 스스로 벗게 만들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끄시며, 고향 면사무소 옆에서 郭ㅇㅇ대서소를 운영하셨다.
가장이라는 뭉클한 이름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셨다.
등 뒤에 나를 태운 아버지는 목적지를 말해주시지도 않은 채 자전거를 페달을 묵묵히 밟으셨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자전거가 가는 방향이 아버지가 일하시는 근무처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대서소 문을 열고 들어선 아버지는 연탄불 화력을 높이시며 나를 당신 책상에 앉아 보라고 손짓하셨다. 나는 금세 주눅이 들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아버지 의자를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어정쩡하고 안절부절못한 나를 보고 아버지는 네게 말씀하셨다.
"남자가 당당해야지, 쭈뼛거리고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의 꿈을 물어오셨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나는 아버지께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버지요~
저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뭔데?
빵공장 사장입니다!
부자가 되겠습니다.
빵 많이 먹고 싶습니다.!
하필 왜! 빵공장이야.?
아버지! 엄마 때문입니다.
엄마가 빵 훔쳐먹었다고 나만 많이 때리십니다. 실은 그때 엄마는 동네에서 구멍가게(점방)를 하시고 계셨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진열해 놓은 빵의 숫자가 모자라면 어김없이 둘째인 나를 의심했고 득달하셨다.
오죽하면 누나들이 깔깔대며 다리 밑에서 주서 온 아이라고 놀려댔다. 장남 있고 셋째 있고 막냇동생도 있고 누나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내 말에 어이가 없으셨는지 아무 표정 없이 미소를 내 보이셨다.
그래! 꿈을 키우고 희망을 성취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ㅡ
아버지는 내손을 이끌며 학교 교무실, 지소 <파출소> 면사무소, 등을 두루 다니시며 구경시켜 주셨다. 아버지는 군, 면, 리. 를 통틀어 꽤 이름이 나 있었고 지역에서 알아주는 확실한 유지였다.
내가 똘똘했는지 영악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 존재가 곽정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엄청 기분 좋았고 우쭐했다.
나비가 날아가듯, 기분 좋은 생활은 정확히 3년은 이어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손을 끌어당겨 당신 바지 주머니에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매우 춥다!
머리를 최대한 숙여라!
아버지 허리를 꼭 잡아라!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와락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품 안이 그렇게 포근하다는 걸 처음 느꼈다.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하얀 사탕 한 개를 내 미셨다.
아~아~ (십리 오다마 ) 사탕이었다.
{ 깨알 하나가 속 깊이 박혀있는 하얀 사탕으로서 이빨로는 절대 깨트릴 수가 없고 한번 빨기 시작하면 장장 4킬로를 걸을 수 있다 해서 붙여진 보릿고개 사탕임}
아버지가 주신 사탕 한 개를 입에 물고 나는 왠지 모를 들뜬 마음으로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날 하루 아버지와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 시간을 공유하며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장차 십리 오다마 사탕처럼 내 삶이 고뇌와 번민과 인내의 연속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말이다
아버지의 넓은 어깨는 점점 좁아지고 축 늘어진 아버지 모습에 우리 가족들은 높다란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만큼 아버지 병세는 깊어만 갔고 아버지의 오랜 병마는 우리 집 전재산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부농은 아니었지만 밥 세끼는 때우는 보통 살림이었다. 긴병 앞에 장사 없고 시간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풍비박산, 이라는 말이 우리 집 "여기저기, '구석구석,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집 한탄과 신세 소리를 들었을까? 1971년 봄이 오려면 아직 먼 추운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불러 모았다.
둘째 누나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기종아!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아!
빨리 안방으로 건너오라고!
누나는 몇 번이고 나를 향해 소리쳤지만 나는 옴짝달싹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무서움보다 그냥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불효자 같은 놈..
끝내 나는 아부지 임종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엄마에 대한 미안함..~
자식 잘 키우라는 당부와 함께..~세상 눈을 감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둘째야~ 둘째야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세세히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빼닮았다. 버릇과 습관 행동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형제(3대 자손) 중에 희한하게도 A형 혈액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와 나뿐이다. 우리 집 초가지붕 위에 아버지의 흰 저고리가 던져졌을 때, 아부지의 영혼은 그렇게 멀리멀리 우리 곁을 떠날 채비를 하셨다.
요령잡이의 구슬픈 상여소리는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북망상천 가신님 아! 어느 때 오시려나 어허야 뒤야 어하 뒤야 어기어차..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산도 넘고 강도 넘세 어허야 뒤야 어기어차~
애달픈 곡(哭)소리에 나는 그만 울컥했다.
아부지! 아버지요? 잘 가세요!
아버지는 당신이 누울 땅 한평 남겨놓지 않으시고 허망하게 저승에 영면하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나는 형과 함께 아버지 묘소 옆에 앉아 이제 닥쳐올 세상살이 모진 풍파를 걱정하고 인내하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와 추억들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처럼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새 형과 나는 지천명에 들어섰다.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지만. 우리 형제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살만하니까/
세상이 좋아지니까/
??
7년 전 형은 짧은 이승을 살다가 황망이 하늘나라로 떠났고 엄마도 지난해 11월 오매불망 그리워하셨던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이제는 내 차례가 다가온 것 같다.
정말이지, 죽음은 순서대로 가야 한다...ㅡ